서울역사박물관,‘한양의 여성 공간’ 첫 발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798회 작성일 22-01-09 23:41본문
여초도시 한양을 여성의 관점으로 바라본 최초의 연구서로 여성 활동 공간 조사
서울역사박물관장(김용석)은 도시 한양을 여성의 시각으로 최초로 조명한 서울기획연구 9『한양의 여성 공간』보고서를 2021년 12월 발간했다.
왕비 정순왕후(貞純王后), 사대부 부인 김돈이(金敦伊), 의녀 취엽(翠葉), 인향(仁香), 나인 노예성(盧禮成), 상인 김조이(金召史), 무녀 용안(龍眼), 불덕(佛德) ... 드러나지 못했던 여성의 이름들.
한양의 인구 중 절반이 여성이었지만, 역사에 기록된 인물은 몇 명 되지 않다. 그마저도 ‘누구의 부인’ ‘누구의 딸’ ‘성씨’ 만으로 불리거나 기록되어 있다. 이번 서울기획연구『한양의 여성 공간』에서는 조선시대 한양을 거닐던 여성들의 드러나지 않은 역할과 장소 이야기에 주목했다.
한양도성 안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여초도시(女超都市)’
현존하는 연대기 자료상의 인구 데이터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한양 여성인구의 추이를 살펴보면, 17세기 11만 6,801명에서 19세기 말 16만 2,141명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는 가운데 여성인구는 서부와 남부지역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다만, 정조 13년(1789)을 기점으로 여성 인구가 일정하게 감소하여 남성 인구가 여성 인구를 상회하는 추세를 보이지만, 중부의 경우 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여성인구가 남성인구를 대체로 상회하는 양상을 띠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양도성 안은 남성보다 여성이 많은 공간이었다.
왕비들의 문화행사와 장소, ‘친잠례와 선잠단’
농업을 기간산업으로 하는 조선왕조에서는 권농정책의 일환으로 매년 봄에 국왕이 주도하는 친경의례를 시행하였으며, 왕비는 부녀자들의 양잠업을 장려하는 ‘친잠례’를 행하였다. 조선시대 최초의 친잠례는 성종 대 시행되었으나 양란의 여파로 인조 대 이후 시행되지 못했다.
1767년 영조는 친잠례를 부활시키고 폐허가 된 경복궁에 선잠단과 채상단을 설치하였고 당시 정비인 정순왕후로 하여금 선잠단에 작헌례를 행하는 선잠제와 채상단에서 뽕잎을 따는 친잠례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친잠의례 후에는 뽕잎을 먹은 누에의 고치를 거두어들이는 의식[수견의]을 행하도록 하였는데, 수견의는 영조 대 처음 시행한 왕실 여성 의례였다.
영조가 친잠례를 복원한 것은 유교적 이상 정치를 구현하고, 계비로 들어온 정순왕후의 궐내 위상을 강화하고자 고례(古禮)에 맞게 친잠례를 시행한 것이다. 친잠례와 선잠단은 왕실 여성이 중심이 된 상징적 의례와 장소였던 것이다.
한양의 어머니들이면, 일생에 한 번씩은 겪은 ‘출산 공간’
조선 전기 까지 궐내 출산이 허용된 여성은 왕비와 왕세자빈처럼 왕위계승자를 낳을 자격이 주어진 여성으로 한정되었다. 선조대 후궁 정씨와 김씨가 궁궐 밖에서 출산하다가 산고병으로 죽게 된 사건이 있은 후 후궁도 궐내에서 출산하는 법제가 마련되었으며, 안전한 출산을 위해 산실이 배설되고 호산청이 설치되면서 출산을 돕는 의녀가 배치됐다. 한편 출합한 왕자와 공주・옹주의 출산에는 별궁에 의관과 내의녀가 파견되어 수시로 약물을 대령하고 출산을 돕기도 했다.
조선 초 여성들이 남자 의원에게 진맥을 받아 치료받는 일을 부끄럽게 여겨 사망하는 일이 빈번하자 제생원 관원이 부인과 치료를 돕는 의녀의 선발을 청하면서 의녀제도가 공식화되었다고 한다. 이후 의녀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이 마련되고, 한양은 물론 지방에서도 관비를 차출하여 의녀 교육을 시행함으로써 왕실이나 관청에 배속된 의녀의 액수가 정해져 이들이 부인병 치료와 간호・간병을 책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산파는 『경국대전』에 이미 급료를 지급하라는 조항이 확인될 만큼 출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들이었으며, 조선 후기 『규합총서』와『임산예지법』같은 출산 관련 문헌에서 ‘나이 많고 미더운 여성’을 산실에 들인다는 자료가 있어 ‘산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여성들의 발원공간, 사찰 : ‘부디 남성의 몸으로 나게 하소서’
한양은 유교적 통치 질서를 천명한 조선왕조의 수도이지만, 도성 안에는 대규모 사찰인 흥천사・흥덕사・원각사 등이 있었고, 도성 밖에도 다양한 암자와 사찰이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이곳들은 왕실 여성과 양반 사대부가 여성들의 발원처이자 치유의 공간이 되었다. 한편 한양도성 안의 비구니절 정업원, 자수원, 인수원은 조선 전기 왕과 사별한 왕실여성이나 역모에 연루된 집안의 여인과 늙은 상궁들이 거처가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불탄 전국 사찰을 중수하고 불상과 불화를 제작하는 과정이 100년 넘게 이어졌으며, 왕실에서 상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여성 시주자가 등장하였다. 이는 시주자가 왕실 중심인 조선 전기와는 다르게 여성 전 계층으로 확대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여성이 사찰 재건의 주요한 주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왕의 왕비의 수복(壽福), 남편과 자식 등 가족의 번영과 다복, 죽은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리는 발원을 주로 했지만, 여성으로서의 현재 고된 삶을 극복하기 위한 ‘남성으로의 환생’ 기원도 특히 한양과 근교 사찰에서 다수 등장하기도 하였다.
2004년 경기도 의정부 원효사에서는 인조4년 상궁 최씨가 필사한 법화경이 발견되었는데, 책 끝에는 다음과 같은 상궁의 발원문이 적혀있다.
도성 밖 ‘역병의 전초기지’ 활인서와 무녀
활인서는 도성 밖 동·서쪽에 설치하여 전염병의 구료와 민에 대한 구휼활동을 담당하여 도성 내로 유입되는 전염병의 전파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동활인서는 혜화문에서 광희문으로 한 차례 장소를 이전하였으며, 서활인서는 19세기 후반까지 서소문에 위치해 있었다.
국가에서는 한양도성에 거주하는 무녀들을 도성에서 퇴출시키고 관리하기 위해서 무적(巫籍)에 등록 후 광희문과 서소문 밖에 있는 동활인서와 서활인서에 적절하게 배정하여 구료 업무를 맡게 하였다. 또한 동과 서 양서(兩署) 인근에 계획된 주거공간(巫女村)을 만들어 이들을 거주하게 하였다. 이들이 살았던 곳에는 활인새 뒤골, 신당동(神堂洞), 무원교(巫院橋) 등이 지명이 남아있다.
무녀들은 활인서가 폐지될 때까지 무보수로 환자들의 구료·구휼활동을 책임지고 활인서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무세(巫稅)의 형태로 상납하였다. 무녀들의 활인서 활동은 마땅히 져야하는 역인 ‘응역’이었던 것이다. 무녀들은 무의(巫醫)로 활동하는 한편, 가난한 자를 대상으로 하는 치료하는 구료활동을 주로 담당헸다.
활인서는 전적으로 무녀들의 활동과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었으며, 그동안 음사(陰祀)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온 무녀를 의료 및 사회복지 업무에 종사한 한양의 여성 전문직업인으로서 재조명하는 성과가 본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치산이재(治産理財), 여성들의 가계활동과 상업
한양 여성들에게 치산이재(治産理財)는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되었고, 양반 여성들은 전답 경영과 공인권 매도, 고리대를 통해 가계경영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중반 이재운이 지은 ‘해동화식전’을 보면 9명의 거부 열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김극술의 처 박씨와 청파동 과부 안씨가 여성으로 포함되기도 하였다. 박씨는 가계가 어려워지자 당귀 구매를 통해 매매차익을 실현하였으며, 안씨는 원산 객점의 투자를 통해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또한 여성 상인들은 도성 안팎에 채소전·과일전·침자전·분전·족두리전·자반전 등의 점포를 열어 여성들에게 특화된 상업활동을 주로 펼쳤다. 그 과정에서 남인전(男人廛)과 마찬가지로 국역에 응하기도 하였고, 경영이 어려울 때는 정부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대부하거나 상언을 올려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적극적으로 운영에 가담했다.
여성의 생활터전으로서 한양의 의미
조선시대 한양에는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로부터 각사 여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계층의 여성들이 도성 안팎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어진 역(役)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왕조국가의 체제 안정에 이바지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가 강요하는 유교적 여성관에 매몰되지 않고,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활동과 가계살림에 보탬이 되는 상업활동에 적극 뛰어듦으로써 한양의 도시공간을 더욱 활기찬 삶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양은 이처럼 조선시대 전 신분계층을 망라한 여성들이 저마다 삶을 개척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던 생활공간이었다.
서울기획연구 9 ‘한양의 여성 공간’은 서울책방 홈페이지(store.seoul.go.kr)에서 구매할 수 있으며(가격 15,000원. 문의 : 02-739-7033),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museum.seoul.go.kr)에서 e-book으로도 열람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장(김용석)은 도시 한양을 여성의 시각으로 최초로 조명한 서울기획연구 9『한양의 여성 공간』보고서를 2021년 12월 발간했다.
왕비 정순왕후(貞純王后), 사대부 부인 김돈이(金敦伊), 의녀 취엽(翠葉), 인향(仁香), 나인 노예성(盧禮成), 상인 김조이(金召史), 무녀 용안(龍眼), 불덕(佛德) ... 드러나지 못했던 여성의 이름들.
한양의 인구 중 절반이 여성이었지만, 역사에 기록된 인물은 몇 명 되지 않다. 그마저도 ‘누구의 부인’ ‘누구의 딸’ ‘성씨’ 만으로 불리거나 기록되어 있다. 이번 서울기획연구『한양의 여성 공간』에서는 조선시대 한양을 거닐던 여성들의 드러나지 않은 역할과 장소 이야기에 주목했다.
한양도성 안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여초도시(女超都市)’
현존하는 연대기 자료상의 인구 데이터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한양 여성인구의 추이를 살펴보면, 17세기 11만 6,801명에서 19세기 말 16만 2,141명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는 가운데 여성인구는 서부와 남부지역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다만, 정조 13년(1789)을 기점으로 여성 인구가 일정하게 감소하여 남성 인구가 여성 인구를 상회하는 추세를 보이지만, 중부의 경우 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여성인구가 남성인구를 대체로 상회하는 양상을 띠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양도성 안은 남성보다 여성이 많은 공간이었다.
왕비들의 문화행사와 장소, ‘친잠례와 선잠단’
농업을 기간산업으로 하는 조선왕조에서는 권농정책의 일환으로 매년 봄에 국왕이 주도하는 친경의례를 시행하였으며, 왕비는 부녀자들의 양잠업을 장려하는 ‘친잠례’를 행하였다. 조선시대 최초의 친잠례는 성종 대 시행되었으나 양란의 여파로 인조 대 이후 시행되지 못했다.
1767년 영조는 친잠례를 부활시키고 폐허가 된 경복궁에 선잠단과 채상단을 설치하였고 당시 정비인 정순왕후로 하여금 선잠단에 작헌례를 행하는 선잠제와 채상단에서 뽕잎을 따는 친잠례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친잠의례 후에는 뽕잎을 먹은 누에의 고치를 거두어들이는 의식[수견의]을 행하도록 하였는데, 수견의는 영조 대 처음 시행한 왕실 여성 의례였다.
영조가 친잠례를 복원한 것은 유교적 이상 정치를 구현하고, 계비로 들어온 정순왕후의 궐내 위상을 강화하고자 고례(古禮)에 맞게 친잠례를 시행한 것이다. 친잠례와 선잠단은 왕실 여성이 중심이 된 상징적 의례와 장소였던 것이다.
한양의 어머니들이면, 일생에 한 번씩은 겪은 ‘출산 공간’
조선 전기 까지 궐내 출산이 허용된 여성은 왕비와 왕세자빈처럼 왕위계승자를 낳을 자격이 주어진 여성으로 한정되었다. 선조대 후궁 정씨와 김씨가 궁궐 밖에서 출산하다가 산고병으로 죽게 된 사건이 있은 후 후궁도 궐내에서 출산하는 법제가 마련되었으며, 안전한 출산을 위해 산실이 배설되고 호산청이 설치되면서 출산을 돕는 의녀가 배치됐다. 한편 출합한 왕자와 공주・옹주의 출산에는 별궁에 의관과 내의녀가 파견되어 수시로 약물을 대령하고 출산을 돕기도 했다.
조선 초 여성들이 남자 의원에게 진맥을 받아 치료받는 일을 부끄럽게 여겨 사망하는 일이 빈번하자 제생원 관원이 부인과 치료를 돕는 의녀의 선발을 청하면서 의녀제도가 공식화되었다고 한다. 이후 의녀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이 마련되고, 한양은 물론 지방에서도 관비를 차출하여 의녀 교육을 시행함으로써 왕실이나 관청에 배속된 의녀의 액수가 정해져 이들이 부인병 치료와 간호・간병을 책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산파는 『경국대전』에 이미 급료를 지급하라는 조항이 확인될 만큼 출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들이었으며, 조선 후기 『규합총서』와『임산예지법』같은 출산 관련 문헌에서 ‘나이 많고 미더운 여성’을 산실에 들인다는 자료가 있어 ‘산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여성들의 발원공간, 사찰 : ‘부디 남성의 몸으로 나게 하소서’
한양은 유교적 통치 질서를 천명한 조선왕조의 수도이지만, 도성 안에는 대규모 사찰인 흥천사・흥덕사・원각사 등이 있었고, 도성 밖에도 다양한 암자와 사찰이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이곳들은 왕실 여성과 양반 사대부가 여성들의 발원처이자 치유의 공간이 되었다. 한편 한양도성 안의 비구니절 정업원, 자수원, 인수원은 조선 전기 왕과 사별한 왕실여성이나 역모에 연루된 집안의 여인과 늙은 상궁들이 거처가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불탄 전국 사찰을 중수하고 불상과 불화를 제작하는 과정이 100년 넘게 이어졌으며, 왕실에서 상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여성 시주자가 등장하였다. 이는 시주자가 왕실 중심인 조선 전기와는 다르게 여성 전 계층으로 확대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여성이 사찰 재건의 주요한 주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왕의 왕비의 수복(壽福), 남편과 자식 등 가족의 번영과 다복, 죽은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리는 발원을 주로 했지만, 여성으로서의 현재 고된 삶을 극복하기 위한 ‘남성으로의 환생’ 기원도 특히 한양과 근교 사찰에서 다수 등장하기도 하였다.
2004년 경기도 의정부 원효사에서는 인조4년 상궁 최씨가 필사한 법화경이 발견되었는데, 책 끝에는 다음과 같은 상궁의 발원문이 적혀있다.
도성 밖 ‘역병의 전초기지’ 활인서와 무녀
활인서는 도성 밖 동·서쪽에 설치하여 전염병의 구료와 민에 대한 구휼활동을 담당하여 도성 내로 유입되는 전염병의 전파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동활인서는 혜화문에서 광희문으로 한 차례 장소를 이전하였으며, 서활인서는 19세기 후반까지 서소문에 위치해 있었다.
국가에서는 한양도성에 거주하는 무녀들을 도성에서 퇴출시키고 관리하기 위해서 무적(巫籍)에 등록 후 광희문과 서소문 밖에 있는 동활인서와 서활인서에 적절하게 배정하여 구료 업무를 맡게 하였다. 또한 동과 서 양서(兩署) 인근에 계획된 주거공간(巫女村)을 만들어 이들을 거주하게 하였다. 이들이 살았던 곳에는 활인새 뒤골, 신당동(神堂洞), 무원교(巫院橋) 등이 지명이 남아있다.
무녀들은 활인서가 폐지될 때까지 무보수로 환자들의 구료·구휼활동을 책임지고 활인서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무세(巫稅)의 형태로 상납하였다. 무녀들의 활인서 활동은 마땅히 져야하는 역인 ‘응역’이었던 것이다. 무녀들은 무의(巫醫)로 활동하는 한편, 가난한 자를 대상으로 하는 치료하는 구료활동을 주로 담당헸다.
활인서는 전적으로 무녀들의 활동과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었으며, 그동안 음사(陰祀)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온 무녀를 의료 및 사회복지 업무에 종사한 한양의 여성 전문직업인으로서 재조명하는 성과가 본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치산이재(治産理財), 여성들의 가계활동과 상업
한양 여성들에게 치산이재(治産理財)는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되었고, 양반 여성들은 전답 경영과 공인권 매도, 고리대를 통해 가계경영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중반 이재운이 지은 ‘해동화식전’을 보면 9명의 거부 열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김극술의 처 박씨와 청파동 과부 안씨가 여성으로 포함되기도 하였다. 박씨는 가계가 어려워지자 당귀 구매를 통해 매매차익을 실현하였으며, 안씨는 원산 객점의 투자를 통해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또한 여성 상인들은 도성 안팎에 채소전·과일전·침자전·분전·족두리전·자반전 등의 점포를 열어 여성들에게 특화된 상업활동을 주로 펼쳤다. 그 과정에서 남인전(男人廛)과 마찬가지로 국역에 응하기도 하였고, 경영이 어려울 때는 정부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대부하거나 상언을 올려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적극적으로 운영에 가담했다.
여성의 생활터전으로서 한양의 의미
조선시대 한양에는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로부터 각사 여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계층의 여성들이 도성 안팎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어진 역(役)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왕조국가의 체제 안정에 이바지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가 강요하는 유교적 여성관에 매몰되지 않고,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활동과 가계살림에 보탬이 되는 상업활동에 적극 뛰어듦으로써 한양의 도시공간을 더욱 활기찬 삶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양은 이처럼 조선시대 전 신분계층을 망라한 여성들이 저마다 삶을 개척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던 생활공간이었다.
서울기획연구 9 ‘한양의 여성 공간’은 서울책방 홈페이지(store.seoul.go.kr)에서 구매할 수 있으며(가격 15,000원. 문의 : 02-739-7033),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museum.seoul.go.kr)에서 e-book으로도 열람할 수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